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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39. <부정공>재현배유인경주정씨묘비문(在賢配孺人慶州鄭氏墓碑文)
1. 문헌 목록 〉19. 19世 〉41. <부정공>우겸배유인김해김씨묘표(友謙配孺人金海金氏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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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부정공>영진배숙부인경주김씨묘갈명(永振配淑夫人慶州金氏墓碣銘)
(부정공후)19世영진(永振)配 숙부인경주김씨묘갈명(淑夫人慶州金氏墓碣銘) 故玉川府院君忠獻公後孫通政大夫趙公有賢配曰淑夫人金氏金氏系出慶州冑于敬順王第四子麗朝平章事慶州君諱殷悅勲業顯赫九傳而諱峴平章事 本朝贈領相又四傳諱文起號白村吏判爲 莊陵節臣諡忠毅世襲名德焜燿史乘不須譜也考諱龍浩妣完山崔氏考曰宗硕夫人生於甲申七月十三日而端凝玆仁早知禮讓不脱規矩孝爺孃友昆季事無專行比長歸于趙公永振時尊嫜老而姑己沒矣有姒養偏親孝夫人與之視具怡顔順志左右無方舅曰孝哉姒曰賢哉闌稍繁夫之三昆季與二姊二小姑在焉夫人奉之惟謹各得歡心全家怡怡如在春風和氣中承祭禮敬備至籩豆孔修品物豊潔有庶或饗之之望雖分炊而克謹細鎖之物不以己意立落合謀請姊姒裁之嚴于堤防晨起提甕汲水晝不踰䦱一門之内亦如之君子性嚴夫人先意承順憂患疾病不循俗招巫覡祈禳早擧六男一女顧復之勤與櫛從澣濯躬自爲之鋤圃而供饋滫随紡績而預需吉凶其艱其辛至矣六子之婦敎之初來析著縫舂相資物我無間舅沒而盡誠饋奠三年如一日長姒均後至十六年奉養夫兄極其禮敬撫諸姪皆婚娶及長姪有室悉歸家政每誦賓客不來門戶俗詩書不敎子孫愚之語供賓甚厚製膽幻資子孫夜讀性不喜腥羶不近寸臠嗜蔬菜而氣益浸盛百里之地一日徒歩趁參本親喪祭每歲令節薦時物于宗家仍圍會一室勉諸婦勿忘父母送之之誠焉七十九夫子蒙 恩陞通政階夫人從封淑人八十二歲當回巹筵子孫稱慶戊申遭崩城晝哭盡哀附身附棺戒子靡不誠信夫人視聽聰明縫紉自任寝啖無愆忽示憊翛然觀化乙卯二月十九日也壽九十二葬于本里龜山西畔坐甲原男滿根都事東根在根壽根昌根洪根女夭滿根一男炳寬東根三男一女男炳賢炳烈炳淑女德水張赫鎭在根一男一女男炳表女竹山安圭伯壽根一男三女男炳元女宜寧南元熙陽川許相昌根二男四女男炳學炳賛女光山金箕南慶州鄭赫朝濟州梁敬承星山李在煥洪根無育取從子炳學爲子曾玄蕃不記夫人之孫炳寬余友而雅重者也以其季父所述王大母狀屬余銘墓余按而歎曰夫人盛德懿行宜爲編之彤史垂法閨幃何止一片石之所琢辭者乎盖夫人之所躬操雖富顯者亦所難能而能委曲停當以底于道益見夫人苦心特所凡婦行不及也至若吿戒諸子無不周至皆有明理備在狀中此不復書天道無親常與善人卒享人間未有之福夫人與君子白首相莊而設重牢叩鳳誥慶流後仍考德之盛不可誣也夫銘曰 猗與夫人名閥世家如其賢如其賢報方吉嘉克塞克淵六德孔俱相古哲媛曰惟其徒龜山松柏雙玉永安於乎盛名風雅續刊 驪興 閔丙承 撰 (부정공후)19世영진(永振)配 숙부인경주김씨묘갈명(淑夫人慶州金氏墓碣銘) 고 옥천 부원군 충헌공의 후손 통정대부 조공이 어진 배필을 두었으니, 숙부인 김 씨이다. 김 씨는 경주 김 씨로 경순왕 제四자인 고려조 평장사 경주군 휘 은열(殷悦)로부터 훈업이 혁혁하게 나타났고, 九전하여 휘 현(峴)은 평장사로 본조에서 영상(領相)을 증직하였으며, 또 四전하여 휘 문기(文起)의 호는 백촌(白村)인데 이조 판서로 단종(端宗)의 절신이 되어 시호는 충의이다. 대로 이은 명덕이 이처럼 사기에 환히 빛났으니 더 기록할 것이 없도다. 고의 휘는 용호(龍浩)요, 비는 완산 최 씨(完山崔氏) 종석(宗硕)의 따님이다. 부인이 갑신(甲申)년 七월 十三일에 출생하였는데 단정하고 인자하며 일찍 예절을 알아 법도를 벗어남이 없고 부모께 효도하며 형제끼리 우애하고 일을 천단함이 없었다. 장성하여서는 조공 영진(永振)에게 우귀하였는데 그때에 시부는 늙었고 시모는 이미 별세하여 동서가 있어 시부를 효도로 봉양하였다. 부인이 더불어 함께 살피며 낯빛을 온화하게 하고 뜻을 공순하게 하여 좌우로 법도를 지키니 시부는 효부요 동서는 어질다고 말하였다. 가문이 번창하여 지아비의 三형제와 두 맏누이, 두 시누이가 있었는데 부인이 받들기를 더욱 삼가서 각기 환심을 얻으니 온 집안이 화기애애하여 봄바람 화기 중에 있는 것 같았다. 제사 받들기에 지성을 다하여 제수를 풍결하게 닦아 흠향하도록 하고 비록 분가한 후에도 더욱 삼가서 세세한 물건이라도 형제 합의하여 결정하곤 새벽에 일어나 물 길으며 낮에는 문을 넘지 아니하니, 온 집안이 따라서 그렇게 하였다. 군자의 성품이 엄하니 부인이 뜻을 받들어 순히 하고 근심 걱정 질병에는 세상을 따라 무당을 불러 빌지 아니하였다. 일찍 六남一녀를 두어 구로 복근하여 머리 빗고 세탁을 몸소 스스로 하며, 농사지어 식량을 공궤하고 길쌈하여 길흉사에 보태니 그 어렵고 근고함이 매우 심하였다. 여섯 자부를 신행 초에 가르쳐 수저, 침선, 방직, 기구 등을 내 것 네 것 사이 없이 서로 주고 시부가 별세함에는 三년을 하루처럼 영위에 치성하며, 큰 동서가 죽은 뒤에는 十六년 동안을 큰 시숙을 봉양하며 예와 공경을 다하였고, 모든 조카를 어루만져 다 혼취 시켰는데 큰 조카며느리를 맞아서는 집안 살림을 다 맡겼다. 매양 손님이 아니 오면 문호가 속되고 시서(詩書)를 아니 가르치면 자손이 어리석다는 말을 하며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고 웅담환을 만들어 자손의 밤에 글 읽는데 쓰게 하며, 성질이 생선을 즐겨 아니하고 채소를 좋아하여 기력이 더욱 왕성해서 백리 길을 도보로 하루에 본친 상제에 왕참하였다. 매양 세시와 명절 때에는 물건을 가묘에 천신한 후 한방에 모여서 여러 며느리에게 부모가 시집보낼 때 하던 훈계를 잊지 말라 하였다. 七十九세에 부자가 성은을 입어 통정대부 품계에 오르고 부인이 숙인에 종봉되었으며, 八十二세에 회혼 근연을 당하여 자손이 하상(遐觴)을 올렸다. 무신년에 부자가 별세함에 주곡을 계속하며 몸을 관에 대고 엎드려서는 지성과 믿음을 아니함이 없게 하라고 아들을 경계하였다. 부인이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여 침선을 몸소 하고 침식에 손절이 없더니 문득 병환을 얻어 홀연히 선화하니 을묘년 二월 十九일이었다. 춘추 九十二세로 본리 귀산 서반 갑좌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 만근(滿根)은 도사요, 동근(東根), 재근(在根), 수근(壽根), 창근(昌根), 홍근(洪根)이요, 손자 병관(炳寬)은 큰아들 소생이요 병현(炳賢), 병열(炳烈), 병숙(炳淑)은 둘째아들 소생이요, 병표(炳表)는 셋째아들 소생이며, 병학(炳學), 병찬(炳賛)은 다섯째아들 소생이며, 홍근(洪根)은 아들이 없어 조카 병학으로 후사를 삼았으며 증현은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부인의 손자 병관이 나와 친구인데 바르고 신중한 분이다. 그 계부의 기술한 왕대모 장문으로 나에게 묘갈을 부탁하였다. 내가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부인의 성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명나라 상의국 여관이 쓴 동사(彤史)에 엮어 규범을 삼을 것인데 어찌 한 개비 돌에 새길 말에 그치겠는가. 대개 부인의 몸소 행한 바가 비록 부귀한 자라도 또한 하기 어려운 바를 능히 응용 자득하여 도리를 다하였으니 더욱 부인의 고심 특별한 바를 보겠으며 보통 부녀자는 미치지 못할 바로다. 모든 아들 고계에 주밀 아니한 것이 없이 다 밝은 이치가 있어 장문 중에 다 기록되었으므로 이에 다시 쓰지 않고 천도가 친함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으로 더불어 마침내 인간에 드문 복을 향유하여 군자와 함께 백수에 서로 씩씩하게 거듭 잔치를 베풀어 경사를 후손에 남겼으니 그 성덕을 속일 수 없도다.』 하고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름답고 성대한 부인은 猗與夫人 명문세가로다. 名閥世家 그 어질고 어질어 如其賢如其賢 보본한 방향이 길하고 아름답다. 本報方吉嘉 능히 깊고 능히 맑아 克塞克淵 육덕을 함께 하였다. 六德孔俱 옛적 현원을 보니 相古哲媛 가로되 그 무리였다. 曰惟其徒 귀산송백에 龜山松柏 두 옥이 길이 편안하리. 雙玉永安 이에 성한 이름을 於乎盛名 시문에 이어 간행하리로다. 風雅續刊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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